초등학생 아들과 지리산 종주를 하다


만 20살 때, 그리고 만 30살 무렵 두 차례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 사람들은 그 두 곳의 앞 글자를 따서 이를 “성중종주”라고 한다. 보통 발 빠른 사람은 1박 2일로 하고 평균적인 성인은 2박 3일 하는데 나는 두 번 다 1박 2일로 끊었었다.


서울에서 야간기차를 타고 전남 구례에 새벽 3시 정도에 내려 버스 타고 성삼재에 올라 그때부터 걷기 시작하여 세석이나 장터목 대피소에서 1박 하고 천왕봉 올랐다가 중산리로 내려가는 코스다.


20살, 30살 시절 체력 빵빵하겠다 처자식도 없으니 편하게 일정 잡아서 다녀왔던 곳이다. 빵 몇 개, 라면 몇 개, 참치캔 몇 개로 연명하면서 종주를 해내었었던 기억이 있다.


뭐 이 정도야 라떼 이야기로 들어줄만하다. 그런데 이걸 아이와 함께한다고 하면 이야기는 완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첫째 준서가 올해로 초등학교 4학년, 11세가 되었고 태권도에 수영에 운동도 곧잘 하는지라 애를 데리고 지리산 종주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서한테 물어보니 한다고도 했다(결과적으로 잘 모르고 한 대답이었다). 마침 때는 광복절이 금요일이어서 3일 연휴가 된 차에 2박 3일 지리산 종주를 준서랑 같이 가볼까 한 것이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혼자야 야간기차 타고 새벽부터 걷고 먹는 것도 대충 때운다 하지만, 아이랑 같이 가면 그럴 수가 없다. 먹을 것도 야무지게 챙겨서 3일 동안 둘이 먹을 식량, 간식에, 버너, 코펠에, 침낭, 갈아입을 옷, 상비약에 휴지, 물티슈까지 챙기니 내 70리터 배낭은 그야말로 터질 지경이었다. (준서 배낭은 모양만 있고 안은 거의 비어있었다)


종주 전 날인 14일 저녁에 그 배낭을 짊어지고 용산역에 가서 KTX를 타고 구례구역에 야간에 도착했다. 그 시골(진짜 깜깜한 시골로 택시 야간 기본요금이 6,000원이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어렵게 찾아가 준서와 조촐히 1박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콜택시로 성삼재를 올라갔고 그날 08:10 드디어 종주를 시작하였다.


첫날 종주 시작점인 성삼재(08:10)에서 노고단 대피소(09:30) ~ 피아골 삼거리(11:00) ~ 노루목(12:43) ~ 삼도봉(13:10) ~ 화개재(14:10) ~ 토끼봉(15:00)을 거쳐 연하천 대피소(17:10)까지 총 13.2km를 9시간 내내 걸었다. 평지도 아니고 오르막 내리막 길에, 바위 사이로 난 길과 돌덩이와 자갈과 나무가 뒤섞인 바닥을 등산화로 걷고 등산스틱으로 짚으며 때론 끌어주고 때론 밀어주며 엉덩이로 내려오거나 네 발로 기어오르거나 하면서 첫날 일정을 모두 소화한 것이다.


힘든 첫날 일정을 마치고, 연하천 대피소에서 1박 하는 데 육개장 컵라면과 햇반, 3분 함박스테이크, 참치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넷플릭스도 재밌게 보고 밖에 나와서 하늘에 가득 찬 별도 한참 본 후(성운도 보임) 소등시간인 9시가 되어 나란히 누웠는데 준서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니 조용히 울었다.


- 왜 울어?

- 엄마 보고 싶어..

- 왜 보고 싶은데?

- 산에 있는 게 힘들어요...


소백산도 1박 2일로 오르고, 북한산도 오르고, 섬 백패킹 1박 2일도 다녀온 터라 많이 컸다고 그래서 종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순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아이를 내가 너무 크게 생각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우는 아이를 토닥토닥 달래고 넷플릭스 좀 더 보여주고 잔다고 해서 눕히니 바로 잠에 들었다. 대피소 직원분이 초등학생이어서 따로 구석에서 편하게 자라고 두 자리를 내어준 터에 준서를 조용하게 재울 수는 있었지만, 나뭇바닥 위 발포매트에 침낭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새근새근 잘 자줘서 너무 고마웠다. 준서가 내일 아침 일어나 못 가겠다고 울면 어쩌나 고민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일어나 울면서 못 가겠다고 하면 마을로 내려가 내일 바로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틀째 새벽에 일어났는데 아이가 표정이 좋았다. 오늘 걸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걷겠다고 해서 06:45 연하천 대피소를 떠났다.


둘째 날 역시 연하천 대피소(06:45)부터 벽소령 대피소(09:45) ~ 늦은 아침 식사 (50분) ~ 세석 대피소(15:35) ~ 촛대봉을 거쳐 장터목 대피소(17:55)까지 총 13km를 10시간 20분 거의 내내 걸어서 도착하였다. 둘 다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첫날보다 1시간 넘게 더 걸었다. 장터목에 도착하기 전부터 준서한테 “아빠는 장터목 대피소 보이면 눈물 날 것 같아”라고 했는데 진짜로 장터목 대피소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마구 눈물이 났다.


눈물을 애써 참으며 대피소 자리 배정을 받고 신발장 앞에서 준서 등산화 풀어주는데 순간 감정이 폭발해서 앉아서 엉엉 울었다. 목에 걸린 수건이 없았다면 우는 모습을 준서에게 들킬 뻔했다. 순간 터진 눈물은 멈추지가 않았다. 아이를 힘들게 만든 것 같은 죄책감에 둘째 날 하루 종일 마음이 너무 무거웠는데 대견하게도 완주해 준 순간 고마움에 눈물이 터진 것이다.


대피소에 자리를 깔아주고 준서가 앉아서 쉬는데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너무 고마웠고 대견했다. 티 안 내려고 계속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울었다. 그러다 저녁을 먹기 위해 같이 식수장으로 갔고 짜파게티에 스팸, 참치, 햇반으로 즐거운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소금으로 양치를 하고 샤워타월(간이로 샤워할 수 있는 티슈)로 몸을 간단히 닦은 후 준서를 재웠다. 아직 어리지만 대견했다. 분명 힘들었을 텐데 아빠가 힘들어할까 봐 꾹 참고 이겨낸 모습에 너무나 고마웠다.


내일 일출을 위해 일찍 잠이 든 많은 등산객 아저씨들의 코골이 소리에 대피소는 시끄러웠지만, 둘째 날까지 무사히 일정을 소화한 나는 고마운 마음에 편안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셋째 날에는 준서를 05:40에 깨워 옷을 입혀 천왕봉으로 향했다. 전날부터 컨디션 안 좋으면 안 가도 된다고 했지만 준서가 꼭 가보길 원했다. 06:00에 장터목을 출발해 1.7km를 1시간 30분 걸려 올라서 정상에 섰다. 사방이 뻥 뚫린 봉우리 정상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고 준서도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천왕봉, 1915m,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너무나 멋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지리산 마지막을 기억했다. 장터목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하산을 시작해 14:40 중산리로 내려오는 데 성공했다. 2박 3일 성중종주의 완성이었다. 3일간 총 걸은 거리만 36km가 넘었다.


중산리에서 15:00 서울 남부터미널행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준서는 버스 타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자마자 다시 원래의 초등학교 4학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발목 통증을 참으며 부지런히 걷던 모습도, 높은 바위를 힘겹게 오르던 모습도 사라진채 투정 부리는 아이로 돌아온 것이다.


3일간 종주를 하는 내내, 준서를 보고 ”아들, 몇 살이니, 초등학교 몇 학년이니, 대단하다, 훌륭한 사람 될 거다, 좋은 경험이다, 힘내, 파이팅 해라 “라고 말해준 어른만 100명이 넘었다(사실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준서를 대견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준서만한 초등학생은 종주길에 아예 없었다. 그분들이 전해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지쳐있던 준서를 깨우고 다시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런 응원 아니었다면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른인 나도 힘들었다.


길가에서 준서를 응원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따뜻한 마음과 동시에 그 어떤 어려운 일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