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 어린이집 연말 발표회를 보러가다
둘째 민서는 늘 어렸었다.
오빠 뒤를 따라다니고 오빠 뒤에 숨는 아이. 오빠가 하자고 하면 따라 하고 오빠가 안 놀아주면 우는 아이.
큰 소리에 예민해 영화관에 가면 나가자 했고, 집에서 야구 보다가 내가 환호성을 지르면 그대로 울며 아빠를 째려보는 그런 아이였다.
작년까지 민서를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다 알 것이다. 엄마, 아빠, 오빠 외에 정답게 눈을 마주 보거나 하이파이브하는 행위들이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집에 찾아오는 손님도, 우연히 마주친 이웃도 새초롬한 민서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슬몃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들이 오히려 미안해하며 피해 주었다. 할아버지, 고모부 모두 선량한 피해자였다.
그런 민서가 올해 들어 많이 변했다. 작년까지는 “쟤 언제 사람 되나” 싶었는데 올해부터 호모사피엔스 같은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선, 길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면 “안녕!”하고 먼저 인사를 했다. 예전에는 그 친구가 다가와 인사해도 도망가기 바빴었다. 다음으로, 우연히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피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엄마나 아빠 뒤에 숨었을 텐데 이제는 그런 것 없이 당당히 서있었다. 끝으로, 할아버지, 고모부뿐만 아니라 내 지인(대부분 아저씨들)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살갑지는 않더라도 인사도 하고 간단히 하이파이브 정도는 해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좀 갖추기 시작했다 정도였다. 초등학교 정도는 가야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러한 나의 상황 인식 하에서,
지난주 금요일, 민서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연말 발표회가 열렸다. 모든 어린이집 친구들이 나와 춤추고 노래하고 연주하는 나름 큰 행사였다.
민서는 약 2주 전부터 몹시 신나 있었다. 친구들과 단체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고 했다.
"진짜야? 와 우리 딸 대단하다. 아빠는 벌써부터 가고 싶은데. 내일 어린이집 같이 가서 보면 안 될까? 아빠도 춤추고 싶은대 같이 추면 안될까? 너무 기대된다." 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내심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물론 열심히 연습은 하겠지만 민서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쉽사리 상상되지 않았다. 아마도 시끄러운 무대에서 울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오히려 앞섰다.
그런 걱정 속에서도 민서는 매일 같이 퇴근 후 아빠를 기다려 춤 연습한 것을 보여주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행복감은 치사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민서가 춤을 출 노래는 "내가 바라는 세상"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춤출 노래인 "Home sweet home"과 "진짜배기(이건 뭔 노랜가 했다)"까지 연습해서 보여주었다.
아빠의 몸치 DNA를 덜 물려받아서 인지 제법 춤을 잘 췄다. 저녁마다 같은 곡을 세네 번씩 반복해서 추는 민서를 보며, "우리 딸 지드래곤보다 춤을 잘 추는 것 같아. 케이팝 스타 같은데. 아빠도 같이 추면 안될까? 너무 멋지다."라고 응원해 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했다. 저렇게 열심히 연습했는데 무대에서 당황해서 울면 어쩌지, 본인한테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났고 어느새 나는 "Home sweet home"과 "진짜배기(이건 여전히 진짜 뭔 노랜가 싶다)"의 안무를 따라 추는 지경에 이르렀다. 딸 어린이집 발표회가 아니라 내가 오디션을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암튼 공연일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많아졌다. 본인 몫만이라도 잘해야 할 텐데 싶었다.
그런데 발표회를 이틀 앞두고 민서가 집에 와서 폭탄발언을 했다. 전체 대표로 인사말을 한다는 거였다. 6살 열매반에서 두 명이 나와 첫인사말을 하게 되었는데, 같은 반 도현이랑 자기가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피해 다니고 눈도 못 마주치고 낯선 사람만 보면 울던 아이가 관객 250여 명 앞에서 인사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왜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싶어 반신반의 알겠다고 했다.
발표회 아침, 출근 전에 민서에게 물었다.
"민서야, 인사말 잘할 수 있어? 아빠 앞에서 한 번 해볼래?"
민서는 길지 않은, 그러나 쉽지 않은 몇 문장 인사말을 수줍게 보여주었다. 연습을 많이 했는지 틀리지도 않고 잘 해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컸나 싶었다. 내가 알던 민서가 맞나,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아빠 너무 기대돼. 떨지 말고 잘해. 이따가 일찍 가서 앞자리에 앉아있을게."
발표회 시작 전, 아내, 준서와 함께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장은 금세 자리가 찼고 사람들의 열기가 가득했다. 내가 더 떨리기 시작했다.
3:30, 공연은 시작되었고 사회자가 "김도현, 송민서 친구 무대 위로 입장해 주세요" 하는데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긴장된 표정의 민서가 씩씩한 발걸음으로 입장했다. 표정이 안 좋았으나 묘하게 자신감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잘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저희는" 으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듣는 내내 민서가 많이 성장했음을, 씩씩한 아이로 자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품 안에 있던 아이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고마웠다.
인사말을 잘 마치고 돌아간 민서는, 춤 공연도, 악기 공연도, 합창도 모두 잘 해내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총총 걸어 우리 가족 품에 돌아온 민서는 투정 부리는 6살 아이 그대로였지만 그전보다 더 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발표회 공연은 끝났지만 여전히 나와 민서는 "Home sweet home"과 "진짜배기(아직도 이 노래는 이해가 잘 안된다)"를 들으며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딸바보 아빠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준 어린이집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