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ID Memo
저의 관심사는 한국의 선거행정 및 민주주의입니다. 선거행정은 선거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과 관련된 모든 행정업무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선거행정의 목적은 선거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보장하는 것인데, 이는 대의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5년 이상 선관위에서 선거행정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그 경험이 제 사고에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정파적 이해를 벗어나 공정과 중립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조직문화 또는 환경은 제가 관련 주제 또는 분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과 관점, 그리고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선거에는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자유와 공정 등 여러 균열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후보자와 정당들은 저마다의 선거 승리를 위해 치밀한 전략을 가지고 그 균열들을 활용하겠지만, 선거를 관리하고 때로는 중재해야 하는 선관위 공무원 입장에서는 항상 중립적 태도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당위성에서 비롯한 중립성 강박은 제 안에 규범성 혹은 도덕률로 오랜 기간 체화되었고 어쩌면 저의 가장 중요한 신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선관위 그리고 선거행정에 대한 국민 불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논란은 있었으나 지난 12. 3.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 선포 이유에 부정선거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신의 폭과 깊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선관위에 군부대를 출동시켜 전산서버를 점검하려고도 하였습니다. 모두 부정선거에 대한 의심, 그리고 그 기저에 있는 선관위의 중립성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의심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지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3월 11∼13일 전국 만 18세 이상 시민 1천1명을 대상으로 '12·3 비상계엄' 사태와 윤 대통령 탄핵심판 관련 6개 기관 신뢰여부를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 포인트)를 하였는데, 그중 선관위는 '신뢰한다'가 44%, '신뢰하지 않는다'가 48%로, 지난 1월 조사(신뢰 51%·불신 40%)보다 큰 폭(7%p)으로 신뢰도가 떨어진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1]
지난 15년간의 저의 경험과 그로부터 견지된 중립성 및 공정성에 대한 인식은 외부세계의 급작스런 비판과 의심에 일종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의심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지난날 선관위의 선거행정에 대한 국민 신뢰는 꽤 높았습니다. 2007년 동아시아연구원이 실시한 조직 신뢰도 순위에서 헌재, 대법원에 이어 국가기관 중 3위를 차지했고,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시한 부패인식도 조사에서도 헌법기관 중 가장 청렴한 기관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선거행정상의 작은 실수나 오류는 있었지만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에 신뢰의 문제는 크게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쿠리투표, 특혜채용 등으로 이어진 불신의 고리 속에서 이것이 부정선거, 즉 민주주의 근본원리인 선거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문제가 증폭된 것입니다.
3. 15. 부정선거에 대한 반성으로 탄생한 독립적 헌법기관인 선관위의 중립성에 대한 불신이 더 깊어질 경우 이는 단순히 선관위 기관 자체에 대한 의심을 넘어, 4년 전 미국 대선 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의회 인증을 저지하려 국회 의사당에 난입한 1.6 사태처럼 대의민주주의 근본원리에 대한 전체적 저항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지난 1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 난입사태에서 그 예고편을 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선관위 및 선거행정의 무오류성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투표와 개표 관리가 사람들의 손을 통해 이뤄지는 이상 실수와 오류는 언제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단순 오류인지 혹은 의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보면서 국민의 눈높이에서 중립성, 공정성에 대한 의심을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해당 의심들이 어떤 연유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연구를 통해 살펴보면서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일거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뢰는 무너지기는 쉽지만 다시 회복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특히 여러 사건이 겹쳐져 생긴 강한 불신은 회복이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중립성 및 공정성에 대한 강한 열망과 선거행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굳은 의지는 이 분야 연구에서 제가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정치학계, 행정학계, 그리고 정치권, 언론 등에서 이 분야를 연구하거나 정책을 통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 중 실제로 선거행정에 종사하면서 투표와 개표를 직접 관리해보고 선거환경을 체험해본 사람, 즉 정확한 현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유일한 해결책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직 내 연구를 통해 보다 명확한 내용을 외부에 정확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영상, 그림, 글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살펴보고 그 안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의미를 탐구하는 것, 즉 고등단계의 심화된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이 선관위라는 조직의 관점 그대로 연구에 투영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외부의 시각을 반영하여 객관적으로 검증을 해야만 왜곡된 혹은 편향된 연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선거행정 분야에서 가진 경험이 많고 특히 부정선거와 관련해서 직접 투개표 관리경험을 한 것을 토대로 반박 연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제가 원하는 답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답을 정해놓고 하는 연구가 될 수도 있기에 더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지속적인 자기객관화를 통해 균형감을 유지하며 전체 연구를 왜곡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객관적 연구를 위해 스스로에게 상기시키자면, 선거행정 분야에서의 현장 경험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도 될 것입니다. 전술한 내용을 읽어보면 느껴지겠지만, 어쩌면 “내가 한 일은 잘못되었을리 없어” 또는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줄거야”같은 태도로 연구를 진행한다면, 저는 연구자보다는 정책결정자 혹은 개혁자 역할에 머무를 위험이 클 것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더 균형잡인 태도를 유지하고자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시해왔던 선거관리, 선거행정 자체가 논란의 중심에 설 때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해 줄 연구가 한국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선거행정의 위기는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의 정당성 약화라는 국가적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선거행정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작금의 한국 선거행정의 위기 상황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미약하지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025. 3. 18. 제출 >
[1] https://www.yna.co.kr/view/AKR202503140741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