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선거 이야기
고대 로마 왕정과 공화정 운영원리의 핵심에 "선거"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꽤 낯설다. 일반적으로 선거는 현대의 문법이지 고대의 문법은 아니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타국에서 이주한 사람이지만, 타국인이 로마 왕이 된 선례가 있다. 처자와 함께 전 재산을 가지고 로마에 왔으니까, 이 로마에 뼈를 묻을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이도 책임 있는 공직에 앉기에 적당하고, 선왕의 신뢰도 두터웠고,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고 로마법을 존중하는 점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 <로마인 이야기 1> 중에서
위 내용은 고대 로마의 제5대 왕이었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선왕이 죽은 뒤 스스로 왕에 입후보하여 선거운동 과정에서 한 발언이다. 오늘날 선거에서 후보자가 했다고 해도 전혀 손색없는 발언을 2600년 전에 했다고 하니 선거운동의 역사가 그리 짧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아래의 연설과 비교해 보자.
제 아버지는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외국인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염소를 치며 자랐고, 양철 지붕의 판잣집 학교에 다녔습니다. ... 각고의 노력과 끈기로 제 아버지는 마법 같은 곳, 즉 이전에도 수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기회의 등불로 여겨져 온 미국에서 공부할 장학금을 얻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 그들은 관용적인 미국에서는 이름이 성공의 장벽이 되지 않는다고 믿으며, 제게 아프리카식 이름 버락, 즉 "축복받은 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 저는 제 이야기가 더 큰 미국의 이야기의 일부임을 알고, 제 이전에 온 모든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지구상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제 이야기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 우리는 한 민족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우리 모두는 미합중국을 지킵니다.
- <2004년 민주당 전국 전당대회 기조연설> 중에서
위 내용은 미합중국 44대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의 전당대회 기조연설 중 일부이다. 나는 외부인이지만 이 공동체를 존중하며 그로부터 받은 기회를 통해 기여하고 싶다는 논리구조는 타르퀴니우스와 동일하다. 선거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망은 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한 듯하다.
<로마사>를 쓴 리비우스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을 하고 자기에게 표를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민회는 타르퀴니우스를 압도적 다수로 왕으로 선출했고 원로원도 이견없이 이를 승인했다. 로마의 제5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37년 동안 로마의 세력권을 확장시키고 시민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시켰다고 하니 그의 공약이 그리 헛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로마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최고제사장에 입후보한 후 선거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합동 연설회 같은 공식적 선거운동 기회가 없었기에 주로 아래의 네 가지 선거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살루타토레스 : 가정 방문이다. 선거운동원이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누구에게 표를 달라고 부탁한다.
아섹타토레스 : 유권자들이 포로 로마노나 시장 같은 데로 일하러 갈 때, 그들과 동행하면서 설득하는 운동원을 말한다.
레둑토레스 : 아섹타토레스가 일하러 가는 유권자를 설득하는 사람이라면, 레둑토레스는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유권자를 따라가면서 설득하는 사람을 말한다. 도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적당한 시민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설득하는 운동원이다.
노멘클라토레스 : 남에게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노려서 설득하는 운동원을 말한다.
이 같은 선거운동 방식은 카이사르만의 독창적인 방법은 아니고 기원전 63년도 집정관에 출마한 키케로도 똑같은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했었다고 한다.
다시 타르퀴니우스로 돌아오면, 그는 왕이 되자마자 개국 이래 줄곧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수를 200명으로 늘렸다. 원로원 의원은 오직 왕이 지명할 수 있었기에 그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원로원 의원으로 지명하여 자신의 권력 확립에 힘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중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 역시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최고 권력자들이 권력 유지 또는 확립을 위하여 하는 오늘날의 행보와 비슷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70세 이상 대법관 1명당 추가로 1명을 임명할 수 있도록 최대 6명까지 대법관을 늘리는 법안을 제안했다. 루스벨트의 의도는 대법원의 이념적 균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 자신의 뉴딜정책 법안에 대한 위헌 판결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법원 채우기 계획(Court-Packing Plan)"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여야를 막론하고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오랜 논쟁 끝에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법안이 논의되는 사이 대법관 오언 로버츠(Owen Roberts)가 뉴딜 지지 쪽으로 입장을 바꾸고 보수 대법관 한 명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후 뉴딜 법안은 더 이상 위헌 판결을 받지 않았다.
- Federal Judicial Center 사이트 내용 중에서
로마의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했는데, 사실상 이것은 세제 개혁이자 동시에 선거제도의 개혁이었다. 그는 군역(軍役), 세금, 투표권을 하나로 연결했는데,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다한 사람을 시민으로 인정하여 투표권을 인정해 준 것이다. 다시 말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의무 이행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경제력에 따라 군사적 책임을 지고 그에 비례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를 완성한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많은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많은 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당연시되는 1인 1표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군단의 최소 단위인 백인대(centuria)를 투표 단위로 설정하여 각 백인대가 1표를 행사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즉, 로마에서는 100명이 한 표를 갖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경제력이 높은 계층이 더 많은 백인대를 구성하게 되어 정치적 영향력 역시 더 크게 행사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투표할 때 백인대별로 내부적으로 의견을 통일하여 통일된 한 표를 행사하였겠지만, 실제로는 백인대를 국가에 제공할 의무를 가진 사람(경제력 높은 계층인 제1계급)이 그 백인대에 주어진 한 표를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민회의 총투표수가 당시 193표였는데 제1계급이 일치단결하여 투표하면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당시 로마는 민주정치가 아닌 과두정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군역-세금-투표권이 일치되었기에 이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열흘 이상 붉은 꽃은 없다고, 로마의 왕정은 제7대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전제적 통치에 대한 반발로 붕괴되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별명인 수페르부스(superbus), 라틴어로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로 불렸었고 폭정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마지막으로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다만 공화정 체제에서도 선거는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왕을 선출하지는 않았지만 민회에서 임기 1년인 2명의 집정관을 매년 선출하였다. <로마사>에서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는 어쩌면 선거가 단순한 지도자 선출을 넘어 법에 의해 국가권력의 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집정관은 공화정 로마의 최고위 관직이었다. 민회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취임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선출 프로세스는 왕과 같았으나 종신제 였던 왕과 달리 임기가 1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재선은 허용되었고 연령제한은 40세 이상이었다. 2명의 집정관이 서로 생각이 다를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정책 실행을 위해서는 둘 다 동의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70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각각 자신의 지지층 이익을 분명히 대변했다. 폼페이우스는 군인을 중심으로 한 일반 시민을, 크라수스는 급성장한 경제계의 이해를 대표했다. 특히 폼페이우스의 경우 나중에 원로원 체제의 수호신처럼 평가받기 때문에 그가 일반 시민을 대표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시민들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선의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로마 공화정에서는 모든 결정이 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익적 정책결정조차 결국 표를 얻기 위한 선거 전략으로 귀결되기 쉬웠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당선된 뒤 아래와 같은 연설을 하였다. 아마도 하얀색 토가를 걸치고 민회가 열리고 있는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섰을 것이다. 순백을 의미하는 '칸디드 Candid'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서구 언어에서는 입후보를 뜻하는 낱말 'Candidate'의 어원이다. 연설 내용은 요즘의 대통령선거 후보자 연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시민 여러분, 집정관들이 대부분 당선되기 전에는 겸손한 공복임을 과시해놓고, 일단 집정관으로 선출되면 당장 오만하고 게으른 자로 표변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느냐 앉아 있지 않느냐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도 여러분에 의해 집정관으로 선출된 이상 그 책임을 완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절감하고 있습니다. 집정관이란 로마 최고의 관직인 동시에 군단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합니다. 전투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국가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기를 잊어서는 안 되고, 병사 징집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병사는 시민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병사들이 모두 자진해서 병역에 종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게다가 반대파가 있는 가운데에서 일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책무를 수행하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나와 출신이 다른 분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조상들을 가졌고, 무슨 일이든 무조건 찬성해주는 친척들이 있고, 수많은 클리엔테스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후원자 들은 그들이 실패하는 경우에도 그들을 지켜줍니다. 반면에 내 경우, 나를 지켜줄 것은 나 자신의 능력과 성실함뿐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데에는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책무를 완수하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고생과 위험에 익숙한 자에게는, 위대한 조상의 명성도, 친척이나 클리엔테스들의 세력도 쓸데없는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공동체에 더 공헌한 사람이 좀더 고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고명한 조상들의 초상도 없는 내가 로마 지도층에 들어간 것은 바로 어제 일입니다. 하지만 상속받은 명성을 더럽히기보다는 스스로 명성을 쌓아올리는 편이 더 나은 삶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그들의 지체 높은 혈통을 보여주는 눈부신 조상들의 초상에 대해. 나는 나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수많은 전투의 상처 자국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명성이나 지위는 고생과 위험을 견디면서 나 스스로 획득한 것임을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병사가 된 여러분은 모든 고난을 나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로마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행군할 때에도, 전투에 임해서도, 나는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휘관인 동시에, 여러분과 똑같이 위험을 나누어 갖는 전우로서. 신들의 가호에 힘입어, 승리도 명예도 찬사도 모두 우리 것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초기 로마에서 왕은 세습이 아닌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성 확보는 로마가 시민 참여, 권력 견제 등 현대 민주주의 원리들을 두루 포섭하여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왕정 타도를 이끈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초대 집정관)는 왕을 추방한 직후에 포로 로마노에 모인 시민들에게 앞으로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의 집정관 선거는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