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재건시대와 복원시대, 그리고 트럼프시대
: 노예해방으로 인한 자유는 투표함 앞에서 멈췄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I believe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스스로 분열된 집은 설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이고 반은 자유인 상태로 영구히 존속할 수 없다고 믿는다.
- 남북전쟁 전 애브러햄 링컨의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 중 (1858년 6월 16일)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예해방론자였던 링컨의 대통령직 취임으로 인해 남부 7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링컨의 연방정부는 남부 주의 연방 탈퇴를 인정하지 않았고 1861년 4월 12일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4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많은 기반시설이 파괴되었고 75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1865년, 4년간 이어진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나면서 노예가 해방되었고, 흑인들은 시민권과 투표권을 인정받게 되었다(수정헌법 제13조~제15조). 링컨의 노예해방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으며 동시에 재건시대 Reconstruction Era 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 수정헌법 제13조: 노예제도 폐지
- 수정헌법 제14조: 흑인에게 시민권 부여
- 수정헌법 제15조: 인종을 이유로 한 투표권 박탈 금지
재건시대 흑인들은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대표를 선택했고 어떤 이들은 직접 선거에 나가 당선되어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1877년까지 이어진 재건시대 동안 흑인들은 백인 중심 정치체제에 새로이 진입할 수 있었다. 다만 재건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 기간이 10년 남짓밖에 안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 전체틀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건시대 수정헌법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흑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1877년 미국 제19대 대통령 러더퍼드 헤이스 Rutherford Hayes 는 남부에서 북부 군인을 철수시키고 재건을 종료하기로 남부 정치인들과 타협함으로써 선거인단 다수를 확보했다. 그리하여 남부에서 북부 군인이 떠나자 남부는 말 그대로 재건시대 이전으로 복원되었고 과거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억압적 제도들이 그 모습을 바꿔서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복원시대의 시작이었다.
복원시대 Redemption Era 의 '복원'은 말 그대로 백인 우월주의 체제의 회복이었다. 재건시대를 주도했던 공화당 세력에 맞서 백인 민주당 세력인 복원주의자들 Redeemer 은 남부에서 다시 주도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짐크로우법 Jim Crow law 으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이 남부 주들에서 다시 심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남부연합은 수정헌법 제13조와 제14조를 피해 가기 위해 ‘짐크로우 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공공장소에서 합법적으로 백인과 유색 인종간 분리하는 것을 허용했다. 미국 흑인들은 "분리하되 평등원칙 separate but equal"을 강요받았다. 이 조치로 흑인들의 경제, 교육, 사회 등에서의 불평등은 더욱 고착되었다.
1896년 대법원에서는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Plessy v. Ferguson, 163 U.S. 537, 1896년)' 을 통해 이를 받아들였다. 극심한 논쟁이 있었던 이 판결을 통해 법원은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것이 평등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원과 같은 공공장소에 “검둥이와 개는 출입 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붙었을 정도로 흑인이 받은 고통은 극심하였다.
흑인들에 대한 공격은 재건시대 이전보다 오히려 더 거세졌다. 흑인들은 쿠 클럭스 클랜 Ku Klux Klan(우리에게는 KKK단으로 익숙한 백인 우월주의 표방단체)의 사적 제재 위협에도 늘 노출되었다. 선거권을 가진 흑인들이 선거인 등록이나 투표에 참여하는 경우에 KKK단은 괴롭힘, 협박, 폭력, 보복 등 각종 테러를 가했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흑인들에게 있어 재건시대의 높은 기대가 꺾인 이후 복원시대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1890년 남부의 주들은 인두세와 문해력 시험을 통해 흑인들의 선거권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즉, 투표를 하려면 세금을 내야 했고(인두세), 글을 읽고 쓰고 해석해야 했다(문해력 시험). 두 가지 조건에서 흑인들은 백인들에 비해 매우 불리했다.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가난한 이들은 주로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흑인 투표권은 사실상 박탈될 수밖에 없었다. 법은 존재했지만 권리는 사라지고 있었다.
노예해방으로 인한 자유가 투표함 앞에서 멈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미국 정부는 유권자 등록 요건을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법안 이름은 SAVE(Safeguard American Voter Eligibility·투표자격보호) AMERICA 이다. 유권자 등록 시에는 시민권 증명을 요구하고 투표 시에는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 제시를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거의 유권자 등록 요건을 강화한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기 전에는 다른 법안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통과를 주장하는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은 유권자 등록 때 시민권 증명을 의무화하고, 시민권 증빙이 되지 않은 유권자를 등록한 선거관리 인원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선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민주당은 이 법안이 유색인종과 이민자 등 특정 집단의 투표권을 억압하려는 시도로 규정하고 반드시 저지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 법은 ‘짐 크로우 2.0’으로, 수천만 명의 미국인을 투표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 한겨레 신문기사 중 발췌
선거는 단순히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유권자가 실제로 투표할 수 있는가이다. 재건시대 흑인의 투표권은 복원시대를 거치며 실제로 배제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1965년 투표권법 Voting Rights Act 제정으로 인해 문해력 시험 및 인두세 폐지가 이루어지며 이후 흑인 유권자에 대한 법적 차별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위에서 보는 것처럼 오늘날 미국에서 이 문제는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계속해서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선거와 투표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후퇴하고 다시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미국의 짐크로우 법을 1965년 투표권법이 막았지만 그 법을 오늘날 세이브 아메리카 법이 다시 막아서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재건시대, 복원시대, 짐크로우 같은 이야기가 트럼프시대를 맞아 다시금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