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선거 이야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오랜 기간 귀족정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토지 소유에 기반한 귀족계급이 정치 및 경제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 무렵 상공업이 발달하며 상인 계층이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하였다. 상인 계층은 돈을 벌면서 경제력은 획득했지만 정치 부분에서의 참여 배제로 인한 불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작농 등 농민 계층 역시 토지 소유 제한 문제로 귀족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렇게 귀족과 구분되는 계층을 통칭하여 '데모스 Demos', 즉 시민으로 불렸다. 이러한 데모스의 불만을 최초로 해결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솔론이다. 솔론의 개혁은 소수 귀족들이 국정을 담당하였던 독점적 정치에서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토지가 아닌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권력을 비례하여 배분한다는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이를 티모크라티아 Timo-Kratia 로 부른다.
이는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함으로써 참정권을 더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귀족정치보다 한 단계 진보된 정치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본인이 조절할 수 없지만 재산을 모으는 것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통상이 활발해지는 현실과 달리 여전히 부동산을 중심으로 권한을 배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따라서 솔론 은퇴 후 티모크라티아는 점점 저항을 받게 되었다.
솔론의 개혁이 티모크라티아라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데모크라티아 Demos-Kratia'로 불렸다. 데모스(시민)에 의한 정치체제라는 의미로 민주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영어 Democracy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로마와 달리, 1인 1표가 원칙이었다. 로마에서는 백인대 centuria 라는 집단이 하나의 표를 행사했지만 아테네에서는 개인이 곧 정치의 단위였다. 투표권은 20세 이상의 남성 시민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민회(民會)에 직접 참여해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민회는 비정기적으로 소집되었는데 전쟁에 대한 의사결정, 강화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도 모두 민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정부관리의 선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민회에서 결정되었다.
로버트 달(Dahl, 1989)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소규모의 동질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시민들은 동질적인 동시에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도 거의 없었다. 아테네는 소규모의 도시국가였기에 의사소통 하기에 충분히 작은 규모였던 동시에 다들 짧은 거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즉, 상호간 면대면이 가능한 도시국가였기에 가능한 정치체제였던 것이다.
아테네의 정치는 의회 건물이 아니라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 기슭에 아고라가 건설되었다. 아고라는 '모이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민생활의 중심지를 의미하였다. 초기의 아고라는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었지만 점차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정치의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후세는 이것을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민 개개인이 국정에 직접 참여하고 국가권력 행사에도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전쟁, 동맹 등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결정을 모든 시민이 참여하여 결정하는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가 시행된 것은 아마 이 시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테네의 유권자(성인 남자 시민)의 수는 3만 ~ 4만 정도였고 평상시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1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잠실야구장 수용인원이 25,000명 정도이니 그 절반 정도가 모여 논의를 하고 투표를 해서 의결을 했다고 생각하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와 더불어 클레이스테네스가 실시한 또 다른 개혁으로는 ‘도편추방제 Ostracism’가 있었다. 도자기 파편에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투표하는 제도였다. 한 개인이 지나치게 강력해져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민회는 도편추방제 시행이 결정될 경우 2달 안에 투표를 진행해야만 했다. 투표를 해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당사자를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방은 일시적인 것으로 추방되더라도 시민권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재산을 몰수당하지도 않았다. 10년이 지나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요직에 뽑힐 수도 있었다.
도편추방제에 있어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리스티데스에 관한 일화일 것이다. 도편추방 투표장에서 아테네 정계의 거물이었던 아리스티데스에게 한 사내가 도자기 파편을 내밀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실례지만, 이 파편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글을 몰라서요."
아리스티데스가 그 사내한테 아리스티데스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묻자 사내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아니요. 나는 그 사람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다만, 아리스티데스가 위대한 인물이라느니 정의로운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을 사방에서 하도 듣다 보니까 진저리가 나서요."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 없이 도자기 파편에 자기 이름을 써서 돌려주었고 그해에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테미스토클레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 등이 이 제도로 인해 추방되었다. 다만 이러한 방식의 직접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를 낳았고 결국 해당 제도는 기원전 417년에 폐지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확대는 전쟁과도 관련이 있었다.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 주도의 도시국가 연합군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자비로 참전한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 부대의 팔랑크스 밀집대형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울러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따라 3단 갤리선(트리에레스)를 건조하여 해군을 강화했고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도 노꾼으로 무산 계급 시민들이 활약했다. 이러한 전투에서 시민들이 활약을 보임에 따라 이들의 발언권이 점차 커졌고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민주정치의 확립이 가속화되었다. 전쟁이 민주주의를 확장한 것이다.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수만 명 규모의 시민이 아고라에 모여 직접 정치에 참여한 체제는 이후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국가는 대표를 통해 지배하는 대의민주주의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의 규모가 커질수록 모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실험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는 누구의 것이고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와 관련한 중요한 질문을 여전히 현재에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Dahl, Robert A. (1989), Democracy and Its Critic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