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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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는 ‘킹메이커’라는 영화에서 자세히 묘사된 바 있다. 배우 설경구가 김대중 대통령으로, 배우 유재명이 김영삼 대통령으로 각각 분하여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시절 신민당 전당대회를 살펴보는 것은 독재정권 치하 당내 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젊은 정치인이 어떻게 중앙 정치무대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70년 1월 26일, 신민당은 임시 전당대회를 열었다. 유진오 당시 당대표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신임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해서였다. 당대표는 그 해 하반기에 있을 제7대 대선 후보 경선에 투표할 대의원 선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선 주자들은 해당 전당대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시 전당대회는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결과 유진산 후보가 신임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을 위한 전당대회가 열렸다. 먼저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꺼냈다. 김영삼은 야당이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40대의 젊은 인물로 후보를 내세워 박정희 정권과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김대중, 이철승 역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65세인 유진산 당대표로는 다음 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40대 후보들의 공격을 향해 유진산은 ‘구상유취’, 입에서 젖내가 난다라고 평가절하하며 본인이 직접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유진산은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의 40대 기수론이 당내에서 돌풍을 일으키자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40대 후보들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양보하기로 하였다. 다만 그 조건으로 자신이 지명하는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김영삼 후보와 이철승 후보는 수용했으나 김대중 후보는 당대표의 후보 추천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유진산이 선택하는 한 사람과 김대중 후보가 대의원 투표로 경선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유진산은 김영삼과 이철승 중에서 김영삼을 후보로 지명하였다.

1차 경선 투표 결과, 대의원 총 885표 중 김영삼 후보 421표, 김대중 후보 382표, 무효 82표로 어느 한 후보가 과반수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2차 경선 투표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김대중은 이철승계가 던진 것으로 추측되는 무효표 82표를 집중적으로 공략하였고, 특히 이철승과 접촉해서 당권을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양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결국 2차 투표 결과 김대중 후보 458표, 김영삼 후보 410표로서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결정되었다.

하지만 실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후보에게 밀려서 패배하고 말았다. 90만 표 차이였다. 득표율로 보면 53:45로 근소한 차 패배였다. 4년 전인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의 격차가 100만 표 이상 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선전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득표율 51:41) 40대 기수론만으로 현직 대통령을 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희망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물론 이러한 희망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정권 장악력 강화를 위한 유신 개헌을 결심하게 하였고 실제로 다음 해인 1972년 10월에 유신이 선포되고 영구 집권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1974년, 당대표였던 유진산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시 당대표선거는 3차 결선투표에까지 가야 할 정도로 경쟁이 심했다. 투표 과정에서 고흥문 후보가 김영삼을 지지하며 사퇴했고, 이철승 후보가 김의택을 지지하며 후보를 사퇴하였다. 의장이 3차 투표에 들어가려 하자 2위인 김의택 지지자들이 결선투표를 내일로 미루자고 하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1위 김영삼 측은 결선투표가 하루 연기되면 중앙정보부의 방해공작이 우려되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때 김영삼 후보는 연단에 나아가 신상발언을 하게 된다. 아래는 김영삼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내일로 결선투표를 미루는 것도 감수할 테니 신상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친애하는 대의원 여러분! 나 김영삼이는 죽어도 신민당은 죽일 수 없다는 결심으로 눈물을 머금고 대회연기에 합의했습니다.’ 대의원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1시간 반가량의 대치가 김영삼의 결단으로 해소되고 신민당 전체가 다시 한마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순간 역설적이게도 대회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당선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2권 중에서

결국 결선투표에서 김의택이 극적으로 사퇴하면서 김영삼 후보가 당대표로 최종 확정되었다. 김영삼은 만 46세 역대 최연소 야당 대표에 올랐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신민당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로 정치에서 배제되면서 신민당 내에서는 김영삼이 큰 힘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1970년 김대중과 이철승의 당권 합의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1976년 5월, 김영삼 당대표의 임기종료에 앞서 신민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김영삼은 연임을 통해 자신의 단일지도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고, 이에 맞서 이철승은 최고위원제를 도입해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비주류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 전당대회에서 그 유명한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 벌어진다.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강남 1970에도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장면이 나온다) 당시 이철승은 신민당 내 세력구도에서 김영삼에게 밀리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투표를 하면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깡패들을 동원해서 김영삼계 대의원들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자기 지지자들만 모아서 전당대회를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당대회를 사흘 앞둔 5월 22일 서방파 두목 김태촌은 부하 수백 명을 무장시켜서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사를 대낮에 습격했다. 김태촌은 김영삼에게 죽기 싫으면 항복하라고 했지만 김영삼은 버텼다. 김태촌이 흉기를 들고 위협하려 하자 주변의 친김영삼계 의원들이 억지로 김영삼을 끌고 뒷문으로 뛰어내렸고 김영삼은 결국 다리를 다쳐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

사흘 뒤인 5월 25일 전당대회 당일에는 다시 이철승이 동원한 서방파 조폭들이 전당대회장에 난입해서 또 한 번 난투극이 벌어졌다. 사실 이때 김영삼 쪽에서도 조폭을 동원했고 그 과정에서 김영삼의 조폭들과 김태촌의 조폭들이 서로 각목을 들고 싸웠기 때문에 이 사건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결국 서방파 조폭들은 김영삼 측 대의원들이 전당대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따라서 해당 전당대회에서는 이철승 의원이 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자 전당대회장에서 밀려난 김영삼계 대의원들은 신민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개최했고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두 개의 전당대회에서 두 명의 총재가 나온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양자를 중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양측은 9월 15일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통합 전당대회에서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45%를 득표하며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2차 투표로 넘어갔고 2차 투표를 앞두고 정일형 후보가 이철승 지지를 선언함에 따라 결국 이철승이 당대표가 되었다.

이후 1979년 5월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둘은 당대표를 두고 다시 맞붙었다. 현직 당대표 이철승과 전 당대표 김영삼이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결국 김영삼이 새 당대표로 임명되었다. 김영삼은 유신체제와의 정면대결을 선포하였으며 김영삼의 당대표 선출을 저지하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후 유신체제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인하여 유신체제는 마감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되었다. 단순한 당내 권력 경쟁을 넘어 한국 정치사에 ‘세대교체’와 ‘투쟁적 야당 노선’이라는 중요한 기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아울러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한국 정치사의 거목이 ’40대 기수론’을 통해 등장하게 된 점도 의미가 있었다. 결국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는 단순한 당대표 선출 사건이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도 민주주의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장면이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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