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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선거 무투표 당선

  • 교육감선거 투표용지 : 교호순번제

    이번 제9회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7표를 행사하게 된다. 시도지사, 시도교육감, 구시군의장, 지역구시도의원, 지역구구시군의원, 비례대표시도의원, 비례대표구시군의원이 그것이다. 위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투표용지는 대동소이한데, 교육감선거 투표용지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의원선거에서는 정당명과 함께 기호가 표시된다. 그런데 교육감선거 투표용지에는 정당명과 기호가 없다. 이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교육감의 경우 정당공천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권자는 정당명이나 기호 없이 후보자의 이름만을 보고 선택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투표용지의 배열 순서를 유권자가 정당의 기호로 오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2014년 지방선거부터 교육감선거에 한해 ‘교호순번제’를 도입하였다. 교호순번제는 후보자 이름을 가로로 배열하고 기초의원선거구마다 후보자의 배열 순서를 다르게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A, B, C 세 명의 후보가 출마했다면, 한 선거구에서는 A-B-C 순서로 표시하고, 다른 선거구에서는 B-C-A, 또 다른 선거구에서는 C-A-B 순서로 배열하는 식이다. 특정 후보가 특정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순서를 순환시키는 것이다.

    이 제도가 도입된 배경에는 기존 교육감선거 투표용지가 갖고 있던 문제점이 있었다. 과거에는 후보자 이름을 세로로 배열하고 추첨으로 순번을 정했는데, 유권자 일부가 맨 윗자리를 정당의 기호 1번처럼 인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두 번째 자리 역시 거대 정당의 기호 2번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후보자의 정책이나 자질보다 추첨 결과에 따라 당락이 좌우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4년 1월 교호순번제 도입에 합의하였다. 제도의 핵심은 후보자 간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데 있었다. 단순한 위치 효과 때문에 특정 후보가 유리해지는 현상을 줄이고 유권자가 후보자의 정책과 역량을 중심으로 판단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교육감선거 투표용지는 기존 방식과 달리 후보 이름 자체를 세로 쓰기로 하되 후보 배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 배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는 유권자가 위쪽 후보를 무의식적으로 ‘1번 후보’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선거벽보 역시 같은 원칙에 따라 기초의원선거구마다 후보 사진과 이름 순서를 달리 배치하게 되었다.

    교호순번제는 공정성을 높였지만 선거관리 측면에서는 상당한 부담도 초래한다. 이전에는 교육감선거 투표용지를 광역자치단체별로만 제작하면 되었지만, 교호순번제가 도입되면서 기초의원선거구마다 서로 다른 투표용지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호순번제는 교육감선거를 보다 정책 중심·인물 중심 선거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제도적 장치로 평가되고 있다. 교육감선거는 정당 경쟁이 아니라 지역교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거인만큼 유권자가 후보자의 위치나 순번이 아니라 이름과 정책, 교육 비전을 충분히 숙지하고 투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 법인 또는 단체 정치자금 기부금지

    2004년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국내외 법인 또는 단체의 정치자금, 그리고 국내외 법인 또는 단체와 관련한 정치자금 기부는 금지되고 있다. 이는 부적절한 정경유착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2004년 정치자금법 개정은 한국 정치자금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꾼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배경에는 2002년 제16대 대선 당시 드러난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거대 정당들은 대기업으로부터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에 돈을 가득 실은 채로 정당에 기업의 돈이 기부되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지면서 정치자금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커졌다.

    여기서 도입된 규제가 바로 정치자금법 제31조 ‘법인·단체 정치자금 기부 금지’이다. 정치자금법 제31조 제1항은 국내외의 법인 또는 단체가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2항은 누구든지 국내외 법인 또는 단체와 관련된 자금으로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법인이나 단체 명의의 직접 기부뿐만 아니라, 법인이나 단체가 임직원 및 구성원 등의 명의를 이용하여 우회적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이른바 ‘쪼개기 후원’까지 차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법원은 정치자금법 제31조 제1항에서 “법인 또는 단체는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라고 규정한 것은 법인 또는 단체 스스로 자신의 자금으로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동조 제2항은 법인 또는 단체가 스스로 정치자금을 기부하지 않더라도 기부자금의 모집 또는 조성에 주도적, 적극적으로 관여한 경우에는 “법인 또는 단체와 관련된 자금”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즉 명의만 개인일 뿐 실질적으로는 단체 의사에 따라 조성되고 집행되는 자금이라면 정치자금법상 금지된다는 것이다.

    위 대법원 판례는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이하 ‘청목회’)의 임원들이 공모하여 청원경찰법 개정 입법로비를 위하여 소위 ‘쪼개기 후원’을 한 사안에서 나온 것이다. 청목회는 2008~2009년 청원경찰 처우 개선 관련 법률 개정을 추진하면서, 특별회비 형식으로 모금한 단체 자금 약 3억 원을 회원 개인 명의로 분산하여 다수의 국회의원에게 후원하였다. 청목회는 입법 로비를 위해 약 140명의 의원들과 접촉했고, 실제로 38명의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해당 특별회비가 청목회라는 단체의 의사결정에 따라 사용 가능한 자금이므로 정치자금법 제31조 제2항의 ‘단체와 관련된 자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청목회 간부들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헌법재판소 역시 2014년 결정(2011헌바254)에서 정치자금법 제31조의 합헌성을 인정하였다. 헌법재판소는 ‘단체’란 공동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가진 지속적 조직체를 의미하며, ‘단체와 관련된 자금’ 역시 단체 명의 또는 단체의 의사결정에 따라 사용 가능한 자금을 의미하므로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해당 조항은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를 통한 금권정치와 정경유착을 차단하고, 단체 구성원의 의사에 반하는 정치자금 제공을 방지하기 위한 정당한 입법목적을 가진다고 보았다. 특히 단체의 정치적 표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비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금을 통한 정치활동 방식을 제한하는 것이므로 과잉금지원칙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쪼개기 후원이 현행 제도의 사각지대를 활용한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개인이 특정 정치인에게 연간 500만 원 미만을 후원할 경우 후원자 명단 공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단체 자금을 소액으로 분산하여 제공하면 추적과 감시가 쉽지 않다. 실제 청목회 사건 역시 개인당 수십만 원 또는 수백만 원 이하의 소액 후원 방식이 활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한국의 제도 방향이 미국과는 상당히 대비된다는 점이다. 한국이 2004년 이후 법인 및 단체 자금의 정치 개입을 강하게 차단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면, 미국은 오히려 법인 및 단체의 정치자금 지출을 폭넓게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상징적인 계기가 바로 2010년 연방대법원의 Citizens United v. FEC 판결이다.

    해당 소송은 보수 성향 비영리 단체인 ‘시민연합 Citizens United’이 제기했는데 2008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 당시 상원의원을 비판하는 영화 상영에 대해 미국 연방선거위원회 FEC가 이 영화를 선거 관련 광고로 분류하고 상영을 금지하자 소송을 낸 것이었다.

    이 판결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기업과 단체의 정치광고 및 독립지출을 표현의 자유로 폭넓게 보호하였다. 법원은 후보자나 정당과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지출은 부패의 원인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5대 4 결정으로 회사나 노조도 이른바 ‘독립 지출 independent expenditures (특정 후보 선출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광고비 지출)’을 할 수 있도록 결정). 그 결과 기업과 거대 자본이 선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미국 정치에서는 이른바 ‘슈퍼 PAC(Super PAC)’ 중심의 거대 정치자금 구조가 형성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지출이 형식적으로만 ‘독립적’ 일뿐 실제로는 후보자 및 정당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후보자들이 사실상 자신을 지원하는 슈퍼 PAC 설립과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거대 기부자들은 특정 정치인에게 집중적으로 자금을 제공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 사회에서는 Citizens United v. FEC 판결 이후 “다크 머니(dark money)” 문제가 심각한 민주주의 위협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자금 출처가 공개되지 않는 정치자금이 선거에 대규모로 투입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한국은 금권정치와 정경유착을 차단하기 위해 법인·단체의 정치자금 자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강한 규제 모델을 채택하였다. 반면 미국은 정치자금 지출을 표현의 자유의 영역으로 폭넓게 보호하면서 기업과 거대 자본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나타나는 슈퍼 PAC과 다크 머니 문제는 거대 자본이 민주주의의 정치적 평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정치자금법 제31조는 단순한 자금 규제 조항이 아니라,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경제력에 의해 과도하게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핵심 장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청목회 사건이 보여주듯이 단체 자금이 개인 명의를 통해 우회적으로 정치권에 유입되는 구조는 여전히 차단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검토가 필요하다. 따라서 제도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서 정치자금의 투명성 강화, 선거관리위원회의 상시적 모니터링 체계 구축 등 보다 정교한 제도적 보완 장치 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시민의 정치참여 욕구

    시민의 정치참여 욕구는 특정 시대나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대 아테네는 모든 시민이 민회에 직접 참여해 입법과 정책을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였다. 직접민주주의가 비효율적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기간 유지되었는데, 이는 시민들이 통치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기 로마의 왕은 세습이 아닌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성 확보는 로마가 시민 참여, 권력 견제 등 현대 민주주의 원리들을 두루 포섭하여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왕정 타도를 이끈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초대 집정관)는 왕을 추방한 직후에 포로 로마노에 모인 시민들에게 앞으로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의 집정관 선거는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시민의 투표를 통해 이어져 나갔다.

    근대 미국 독립혁명(1776)에서 식민지 주민들은 단순한 자치를 넘어서 자신들의 대표를 직접 선출할 권리를 요구했다. “대표 없는 과세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구호는 정치적 대표성과 투표권에 대한 요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는 이후 보통선거권 확대의 흐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어 일어난 프랑스혁명(1789) 역시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어 있던 시민들의 참여 요구가 분출된 사건이었다. 이처럼 두 혁명은 서로 맞물리며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시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는 여전히 강력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한국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하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내 손으로 대표를 직접 선택하겠다는 집단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6월 민주항쟁은 단순히 선거제도를 바꾼다는 것보다는 시민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겠다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시민의 정치참여 욕구를 그 시절(기원전 30년 무렵)에도 분명히 통찰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정치참여 욕구가 적절히 해소되지 않을 경우 작은 계기만으로도 사회적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공화정에서 황제의 통치인 제정으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에 있어 그러한 불만 표출은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결과할 수도 있었기에 그의 고민은 깊었을 것이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행정개편을 통해 주(州)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주 내부의 정치는 그 주에 사는 시민, 즉 유권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현대에 발굴된 폼페이 유적의 벽면에는 당시의 선거 포스터가 다수 남아 있는데 이는 지방의 중소도시에 불과했던 폼페이에서도 선거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로마의 선거 방식은 기본적으로는 미국 대통령 선거와 비슷하다. 유권자의 표를 한꺼번에 집계하여 당선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와 각 구의 표를 집계하여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그 주나 구의 ‘표’를 독점한다.)

    그는 행정개편을 통해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키면서도 동시에 선거와 지방자치를 통해 시민들이 여전히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일종의 정치효능감이었던 것이다.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전환되더라도 이는 정치적 안정을 위한 것이며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억압하지 않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시민들의 정치참여 욕구에 대한 이해가 높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정치참여 욕구는 단순히 투표나 선거 절차에 참여하려는 욕망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주체가 되고자 하는 사회적 욕구에 가깝다. 미국 심리학자 Maslow는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기본욕구를 5단계로 분류하고 그 중 ‘자아실현 욕구’를 가장 높은 단계로 지정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고대나 현대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정책 결정에 반영하기를 원하며, 투표는 이러한 요구를 제도적으로 표출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만약 이러한 투입이 제도적으로 정책에 흡수되지 못할 경우 체제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시민의 투표 욕구를 억압하기보다 행정 단위로 세분화하고, 각 단위에서 선거를 실시하게 함으로써 시민들이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식을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체제안정을 유지하였다.

    결국 정치 체제의 안정성은 권력의 집중 여부보다, 시민의 참여 욕구를 얼마나 정교하게 흡수하고 제도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로마 제국, 아테네 민주정, 근대 혁명,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역사적 경험은 하나의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단순히 잘 통치되기를 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통치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 1987년 직선제 개헌 전후 이야기

    1987년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고, 4월 13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 즉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노태우 당시 여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같은 해 10월 27일 실시된 제9차 개헌 국민투표는 찬성 93.1%로 통과되었고, 개정 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는 12월 16일에 치러졌다.

    후보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었다. 선거 결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4%를 득표해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야권의 단일화 실패로 인해 김영삼(28.03%), 김대중(27.04%)이 표를 나눠 가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선거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야권과 그 지지자들의 반발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랜 민주화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정권교체와 군부세력 청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인의 핵심은 분명 야권 분열과 후보 단일화 실패였다. 득표율만 보더라도, 당시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민주화 흐름을 고려할 때 김영삼과 김대중 중 단일 후보가 나왔다면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로 이듬해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된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은 다른 원인을 찾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부정선거’ 주장이 자리 잡았다. 평화민주당은 “권력기관이 총동원된 구조적이고 원천적인 부정선거”라고 규정하며 사례 수집에 나섰다. 단일화 실패 책임론이 제기되자 “단일화가 되었어도 부정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부정선거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국회는 ‘양대선거부정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지만, 최종적으로 조직적인 선거 부정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장면은 낯설지 않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고 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미국에서는 ‘Stop the Steal’이라는 주장이 확산되었고, 이는 결국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으로 이어졌다. 유럽에서도 ‘보이지 않는 세력이 선거를 조작한다’는 식의 불신이 정치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한국 역시 이와 유사한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1987년 대선이 끝난 어느 겨울날, 한 남성이 서울 가리봉동의 한 옥상에 올라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며 “내가 죽어서라도 부정선거는 없어져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는 곧 구조되었지만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불신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부정선거’라는 믿음은 한 번 형성되면 반박하는 증거조차 오히려 본인의 확신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사회심리학자 지바 쿤다(Ziva Kunda)는 인간의 추론이 목표에 의해 체계적으로 편향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추론 목표를 사실에 부합하려는 정확성 목표와 특정 결론에 도달하려는 방향성 목표로 구분했는데, 특히 후자는 개인이 원하는 결론을 지지하는 신념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하나는 신념과 충돌하는 증거를 아예 찾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를 접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일단 특정 신념에 강하게 경도되면, 반대 논거조차 그 신념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반발을 ‘부메랑 효과’라고 부른다.

    선거에서도 이러한 인지적 편향은 쉽게 작동한다. 패배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조작된 시스템’으로 돌리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 쉽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1987년의 혼란은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당시 여론조사업체인 한국갤럽은 박무익 대표의 결단으로, 투표 종료 직후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선거 기간 동안 축적된 지지율 데이터는 실제 개표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는 결과에 대한 사회적 수용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1987년 대선을 둘러싼 부정선거 논란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음모론은 특정 국가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리와, 이를 증폭시키는 환경—특히 최근에는 SNS와 같은 정보 생태계—이 결합할 때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현상이다.

    선거는 투표와 개표로 끝나지 않는다. 패배한 쪽이 결과에 승복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공정한 절차뿐 아니라, 그 절차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투명성과 결과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정보 질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Ref.

    Kunda, Z. (1990). The case for motivated reasoning. Psychological bulletin, 108(3), 480.

  •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는 ‘킹메이커’라는 영화에서 자세히 묘사된 바 있다. 배우 설경구가 김대중 대통령으로, 배우 유재명이 김영삼 대통령으로 각각 분하여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시절 신민당 전당대회를 살펴보는 것은 독재정권 치하 당내 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젊은 정치인이 어떻게 중앙 정치무대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70년 1월 26일, 신민당은 임시 전당대회를 열었다. 유진오 당시 당대표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신임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해서였다. 당대표는 그 해 하반기에 있을 제7대 대선 후보 경선에 투표할 대의원 선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선 주자들은 해당 전당대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시 전당대회는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결과 유진산 후보가 신임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을 위한 전당대회가 열렸다. 먼저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꺼냈다. 김영삼은 야당이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40대의 젊은 인물로 후보를 내세워 박정희 정권과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김대중, 이철승 역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65세인 유진산 당대표로는 다음 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40대 후보들의 공격을 향해 유진산은 ‘구상유취’, 입에서 젖내가 난다라고 평가절하하며 본인이 직접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유진산은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의 40대 기수론이 당내에서 돌풍을 일으키자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40대 후보들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양보하기로 하였다. 다만 그 조건으로 자신이 지명하는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김영삼 후보와 이철승 후보는 수용했으나 김대중 후보는 당대표의 후보 추천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유진산이 선택하는 한 사람과 김대중 후보가 대의원 투표로 경선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유진산은 김영삼과 이철승 중에서 김영삼을 후보로 지명하였다.

    1차 경선 투표 결과, 대의원 총 885표 중 김영삼 후보 421표, 김대중 후보 382표, 무효 82표로 어느 한 후보가 과반수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2차 경선 투표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김대중은 이철승계가 던진 것으로 추측되는 무효표 82표를 집중적으로 공략하였고, 특히 이철승과 접촉해서 당권을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양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결국 2차 투표 결과 김대중 후보 458표, 김영삼 후보 410표로서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결정되었다.

    하지만 실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후보에게 밀려서 패배하고 말았다. 90만 표 차이였다. 득표율로 보면 53:45로 근소한 차 패배였다. 4년 전인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의 격차가 100만 표 이상 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선전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득표율 51:41) 40대 기수론만으로 현직 대통령을 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희망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물론 이러한 희망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정권 장악력 강화를 위한 유신 개헌을 결심하게 하였고 실제로 다음 해인 1972년 10월에 유신이 선포되고 영구 집권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1974년, 당대표였던 유진산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시 당대표선거는 3차 결선투표에까지 가야 할 정도로 경쟁이 심했다. 투표 과정에서 고흥문 후보가 김영삼을 지지하며 사퇴했고, 이철승 후보가 김의택을 지지하며 후보를 사퇴하였다. 의장이 3차 투표에 들어가려 하자 2위인 김의택 지지자들이 결선투표를 내일로 미루자고 하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1위 김영삼 측은 결선투표가 하루 연기되면 중앙정보부의 방해공작이 우려되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때 김영삼 후보는 연단에 나아가 신상발언을 하게 된다. 아래는 김영삼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내일로 결선투표를 미루는 것도 감수할 테니 신상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친애하는 대의원 여러분! 나 김영삼이는 죽어도 신민당은 죽일 수 없다는 결심으로 눈물을 머금고 대회연기에 합의했습니다.’ 대의원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1시간 반가량의 대치가 김영삼의 결단으로 해소되고 신민당 전체가 다시 한마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순간 역설적이게도 대회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당선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2권 중에서

    결국 결선투표에서 김의택이 극적으로 사퇴하면서 김영삼 후보가 당대표로 최종 확정되었다. 김영삼은 만 46세 역대 최연소 야당 대표에 올랐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신민당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로 정치에서 배제되면서 신민당 내에서는 김영삼이 큰 힘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1970년 김대중과 이철승의 당권 합의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1976년 5월, 김영삼 당대표의 임기종료에 앞서 신민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김영삼은 연임을 통해 자신의 단일지도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고, 이에 맞서 이철승은 최고위원제를 도입해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비주류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 전당대회에서 그 유명한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 벌어진다.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강남 1970에도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장면이 나온다) 당시 이철승은 신민당 내 세력구도에서 김영삼에게 밀리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투표를 하면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깡패들을 동원해서 김영삼계 대의원들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자기 지지자들만 모아서 전당대회를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당대회를 사흘 앞둔 5월 22일 서방파 두목 김태촌은 부하 수백 명을 무장시켜서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사를 대낮에 습격했다. 김태촌은 김영삼에게 죽기 싫으면 항복하라고 했지만 김영삼은 버텼다. 김태촌이 흉기를 들고 위협하려 하자 주변의 친김영삼계 의원들이 억지로 김영삼을 끌고 뒷문으로 뛰어내렸고 김영삼은 결국 다리를 다쳐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

    사흘 뒤인 5월 25일 전당대회 당일에는 다시 이철승이 동원한 서방파 조폭들이 전당대회장에 난입해서 또 한 번 난투극이 벌어졌다. 사실 이때 김영삼 쪽에서도 조폭을 동원했고 그 과정에서 김영삼의 조폭들과 김태촌의 조폭들이 서로 각목을 들고 싸웠기 때문에 이 사건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결국 서방파 조폭들은 김영삼 측 대의원들이 전당대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따라서 해당 전당대회에서는 이철승 의원이 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자 전당대회장에서 밀려난 김영삼계 대의원들은 신민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개최했고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두 개의 전당대회에서 두 명의 총재가 나온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양자를 중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양측은 9월 15일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통합 전당대회에서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45%를 득표하며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2차 투표로 넘어갔고 2차 투표를 앞두고 정일형 후보가 이철승 지지를 선언함에 따라 결국 이철승이 당대표가 되었다.

    이후 1979년 5월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둘은 당대표를 두고 다시 맞붙었다. 현직 당대표 이철승과 전 당대표 김영삼이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결국 김영삼이 새 당대표로 임명되었다. 김영삼은 유신체제와의 정면대결을 선포하였으며 김영삼의 당대표 선출을 저지하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후 유신체제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인하여 유신체제는 마감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되었다. 단순한 당내 권력 경쟁을 넘어 한국 정치사에 ‘세대교체’와 ‘투쟁적 야당 노선’이라는 중요한 기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아울러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한국 정치사의 거목이 ’40대 기수론’을 통해 등장하게 된 점도 의미가 있었다. 결국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는 단순한 당대표 선출 사건이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도 민주주의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장면이었다고 할 것이다.

  • 본투표와 사전투표 날인 관련 검토

    선거일 당일 실시하는 본투표와 선거일 전 실시하는 사전투표는 법규정에서 각각을 달리 취급함에 따라 절차와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날인(도장을 찍는 행위) 부분이다. 이에 두 제도 간 날인 방식의 차이와 그러한 차이를 가져오게 된 이유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먼저, 본투표에서의 투표관리관 사인날인이다. 공직선거법은 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에 직접 사인을 날인한 후 이를 선거인에게 교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100매 이내에서 미리 사인을 날인해 놓은 후 이를 교부할 수 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투표용지수령 및 기표절차) ② 투표관리관은 선거일에 선거인에게 투표용지를 교부하는 때에는 사인날인란에 사인을 날인한 후 선거인이 보는 앞에서 일련번호지를 떼어서 교부하되,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100매 이내의 범위 안에서 그 사인을 미리 날인해 놓은 후 이를 교부할 수 있다.

    본투표일 실제 투표자 수는 제21대 대선(2025) 기준 2,400만 명이고, 투표소 수는 14,295개소이므로 투표소당 하루 약 1,680여 명이 방문했을 것이다. 이를 본투표시간 오전 6시~오후 8시(14시간)로 나누면 시간당 120명(1분당 2명꼴)이 하나의 투표소에 방문한 것이다.

    법상 투표관리관은 투표소마다 1명을 두게끔 되어있고 그들의 주요 법정사무는 투표소 총책임자로서 투표절차 안내, 유권자 본인 확인, 투표용지 교부 등 실제 투표사무를 직접 수행하는 투표사무원을 지휘 및 감독하는 업무이다. 따라서 투표용지에 사인 날인하는 것은 임무 중 일부인데, 만약 그들이 기계처럼 하루 종일 투표용지에 사인만 날인해야 한다면 중요 법정사무를 놓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공직선거법은 100매 이내의 범위 안에서 그 사인을 미리 날인해 놓은 후 교부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공직선거법 제146조의2(투표관리관 및 사전투표관리관) ① 구ㆍ시ㆍ군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에 관한 사무를 관리하게 하기 위하여 투표구마다 투표관리관 1명을, 사전투표소마다 사전투표관리관 1명을 각각 둔다.

    ② 투표관리관 및 사전투표관리관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소속 공무원 또는 각급학교의 교직원 중에서 위촉하며, 사전투표관리관은 위촉된 투표관리관 중에서 지정할 수 있다.

    실무적으로는 투표관리관은 그 옆좌석에 투표관리관의 사인날인을 확인 및 보조할 투표사무원을 지정하여 배치하고 있다. 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를 교부하는 때에는 100매 이내의 범위 안에서 미리 사인을 날인하여 두었다가 옆좌석의 보조투표사무원으로 하여금 투표용지에 날인된 청인, 투표관리관 사인의 누락 여부와 인쇄상태 등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본투표에서의 투표관리관 사인날인 관련 내용이다.

    다음은, 사전투표에서의 투표관리관 사인날인이다. 앞서 살펴본 공직선거법 제157조는 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에 직접 도장을 찍은 뒤 이를 투표권자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법은 본투표와 사전투표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공직선거법 제158조는 사전투표관리관에 대해 투표용지 발급기로 선거권이 있는 해당 선거의 투표용지를 인쇄하여 “사전투표관리관”칸에 자신의 도장을 찍은 후에 교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본투표가 사전에 인쇄된 투표용지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사전투표는 투표용지 발급기로 투표용지를 바로 인쇄하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을 추가로 규정한 것이다.

    공직선거법 제158조(사전투표) ③ 사전투표관리관은 투표용지 발급기로 선거권이 있는 해당 선거의 투표용지를 인쇄하여 “사전투표관리관”칸에 자신의 도장을 찍은 후 일련번호를 떼지 아니하고 회송용 봉투와 함께 선거인에게 교부한다.

    따라서 사전투표의 경우에도 법상으로는 사전투표관리관이 직접 사인날인을 하여야 한다. 다만, 공직선거법은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공직선거관리규칙으로 위임하고 있다. 세부적인 내용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의결하여 규칙으로 정하도록 위임한 것이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8항과 제158조 제8항은 그러한 위임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투표용지수령 및 기표절차) ⑧ 전기통신 장애 등이 발생하는 경우 사전투표절차,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규칙으로 정한다.

    공직선거법 제158조(사전투표) ⑧ 투표용지의 날인ㆍ교부방법 및 기표절차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규칙으로 정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직선거관리규칙은 사전투표의 경우 사전투표관리관의 날인을 투표용지에 인쇄된 형태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직선거관리규칙 제84조(투표용지에의 날인) ③ … 사전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에 자신의 도장을 찍는 경우 도장의 날인은 인쇄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다.

    해당 규칙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23. 10. 26. 2022헌마232등 결정에서, 사전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에 자신의 도장을 찍는 경우 도장의 날인을 인쇄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하는 심판대상조항은 공직선거법 제158조 제8항 등에 근거한 것으로서 법률유보원칙에 위배되지 않고, 사전투표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서 입법형성권의 한계를 일탈하지 않아, 선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심판대상조항은 청구인들의 선거권을 침해하지 아니한다고 결정하였다. (헌재결정례 2024헌마283, 2025. 12. 18.)

    실무적으로는 사전투표관리관 도장 인영을 통합명부시스템에 사전에 등록하여 사전투표일에 투표용지 발급기를 통해 투표용지에 자동 인쇄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본투표와 사전투표에서 투표관리관 사인날인 관련하여 달리 규정한 것은 두 투표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본투표는 유권자가 자기 주소지 투표소에서만 투표하기 때문에 그 선거구 후보들 이름을 미리 인쇄해 놓은 투표용지를 준비해 놓을 수 있다. 해당 투표소에서 사용할 투표용지가 미리 확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투표에서 투표관리관은 인쇄된 투표용지를 100 매 단위로 묶어 투표관리관 도장을 미리 찍어놓을 수 있게 된다. 이에 공직선거관리규칙은 투표용지 인쇄시기에 관한 미리 규정하고 있다.

    제71조의2(투표용지 인쇄시기) ① 투표용지는 다음 각 호에서 정하는 날 후에 인쇄한다. 다만, 인쇄시설의 부족 등 선거관리에 지장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해당 위원회의 의결로 그날을 변경할 수 있다.

    1. 투표소에서 사용하는 투표용지

    가. 대통령선거 : 후보자등록마감일 후 13일

    나. 국회의원선거 : 후보자등록마감일 후 9일

    다. 지방의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거 : 후보자등록마감일 후 2일

    하지만 사전투표는 유권자가 전국 사전투표소 중 어디든 한 곳에서 투표할 수 있기 때문에 투표용지를 미리 인쇄하여 준비해 놓을 수 없다. 이에 통합선거인명부를 통해 해당 유권자가 어느 투표구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한 후 그에 따라 맞는 투표용지를 그 자리에서 출력해야 한다. 따라서 그때마다 새로운 투표용지를 뽑아야 하기 때문에 투표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여기에 투표관리관이 매번 사인날인을 한다면 그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21대 대통령선거를 기준으로 하면, 사전투표자 수는 이틀 합산 1,542만 명 정도인데 이를 3,500개 사전투표소 수로 나누면 투표소당 방문자 수는 약 4,400명이 되고 이를 하루 평균으로 나누면 약 2,200명/일이 된다. 하루 12시간 운영되는 사전투표소에서 시간으로 환산하면 약 183명/시간이 된다. 전술한 본투표의 시간당 120명보다 50%가 높은 수치이다. 100매씩 미리 사인날인한 투표용지를 사용하는 본투표에 비해 평균 50% 더 높은 혼잡도를 보이는 사전투표소에서 투표관리관 1명이 사인날인까지 찍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사전투표소는 관내사전투표와 관외사전투표 줄이 나누어져 있고 해당 줄에 각각 여러 대의 투표용지발급기를 동시에 사용하게 된다. 1명의 투표관리관이 돌아다니며 실시간으로 이것을 찍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투표소 총책임자로서 투표절차 안내, 유권자 본인 확인, 투표용지 교부 등 실제 투표사무를 직접 수행하는 투표사무원을 지휘 및 감독하는 업무를 소홀히 할 수 있어 투표관리관을 두는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에 사전투표 유권자의 투표권 행사를 원활하게 보장하고 투표관리관 본연의 임무 수행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공직선거관리규칙으로 투표용지에 인쇄된 형태의 날인을 허용한 것이다. 전술한 헌법재판소 결정도 이러한 취지를 인정하여 해당 규칙은 위조 투표용지 사용 가능성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선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보고 합헌이라고 결정하였다.

    대법원 역시 반복적으로 인쇄날인이 합법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공직선거관리규칙에서는 사전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에 자신의 도장을 찍는 경우 날인은 인쇄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그 취지가 사전투표관리관이 자신의 성명이 각인된 도장을 직접 사전투표용지에 날인할 것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며(대법원 2019. 9. 26. 선고 2017수122 판결 참조), 아울러 이는 투표용지에서 가장 중요한 관할 선거관리위원회의 청인을 인쇄날인할 수 있다는 공직선거법 규정을 참고하여 사전투표의 효율적 진행을 위하여 사전투표관리관의 날인도 인쇄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으로, 공직선거법의 위임범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21. 12. 10. 선고 2017수61 판결 참조).

    이처럼 본투표와 사전투표에서의 투표관리관 사인날인 방식의 차이(직접날인 vs 인쇄날인)는 단순히 절차적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두 투표제도의 구조적 차이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선택인 측면이 강하다. 사전투표는 전국 어느 투표소에서도 투표할 수 있다는 편의성을 제공하는 대신 투표용지를 현장에서 즉시 발급해야 한다는 운영상의 특수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선거의 공정성과 투표용지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인쇄날인 제도이며,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모두 이를 합법 및 합헌으로 판단하였다.

    결국 이 제도는 유권자의 원활한 투표권 행사와 선거관리의 효율성, 그리고 선거의 신뢰성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균형 있게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헌법재판소 결정에 있어서도 2명의 재판관이 반대의견을 낸 데서 볼 수 있듯이 논란의 씨앗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상황으로 이와 관련한 국회의 입법정책적 검토와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것이다.

  • 일본 ‘팀 미라이’의 도전

    팀 미라이(みらい), 낯선 이름일 것이다. 일본 정당 이름인데 우리나라 말로는 미래(未來)이다. 지난 2월 열린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신생 정당 ‘팀 미라이’가 비례대표 11석을 확보하며 원내에 진입했다. 창당 9개월 만의 일이다.

    엔지니어, 컨설턴트, 스타트업 창업가 등 비정치권 전문직 출신으로 구성된 이 정당은 현재 일본 야당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평균 연령 39.7세로, 90년생인 안노 다카히로 Anno Takahiro (이하 안노)가 대표로 당을 이끌고 있다.

    안노 대표는 도쿄대 공학부에서 인공지능을 전공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입사 이후 비즈니스에 AI를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 여러 회사를 창업했다. 그는 SF 작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치활동은 202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시작했는데 당시 5위를 기록했으며 이후 2025년 참의원 선거에 도전하기 위해 ‘팀 미라이’를 창당했다. 투표 결과 팀 미라이는 비례대표에서 2.6%의 득표율로 1석을 확보했으며 이로 인해 안노 본인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일본에서 법적 정당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①소속 국회의원이 5인 이상인 정치단체이거나, ②전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혹은 전회나 전전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의 전국 득표율이 2% 이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팀 미라이는 2025년 참의원 선거를 통해 법적으로 정당 요건을 충족하게 되었다. 정당 요건을 충족해야 중의원 선거 정견방송, 비례대표 중복 입후보, 정당교부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치단체 입장에서는 제도권 정치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팀 미라이 정당은 “「지금」의 생활을 확실히 지원하면서, 「미래」를 향한 성장 투자로 아이들의 세대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테크놀로지」로 행정·정치를 대담하게 개혁해 나갈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AI 전문가가 대표인 정당답게 ‘디지털 민주주의’ 를 중심으로 기술을 통한 정치발전을 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팀 미라이 정책 매니페스토 2026)

    안노 대표는 정치에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팀 미라이는 정당교부금을 사용해 정치 투명성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10명 규모의 「나가타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팀」을 발족했고 그 팀을 통해 정치자금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도구와 국민의 목소리를 정치에 전달하는 플랫폼을 개발하였다.

    팀 미라이는 현대 정당의 성격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거에도 유권자와 함께 소통하는 형태의 정당들은 존재하였다. 하지만 팀 미라이는 인공지능 AI 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 유권자와 실시간 소통하고 그들의 요청에 바로 대응하는 형태로 정당 운영을 바꾸려는 것이다. 디지털 민주주의를 통해 심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 실현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팀 미라이는 단순히 AI 덕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과 미국 등에서도 AI 의 발전 속도는 일본에 뒤질 바는 아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팀 미라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요인은 일본에서는 일정 수준의 득표율이나 의석만 확보하면 정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비교적 작은 규모의 지역 기반 정당 설립도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개방성은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팀 미라이는 바로 그 조그만 틈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한국은 구조적 개방성이 부족하다. 한국 정당법은 정당설립 요건으로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5개 이상의 시도당, 그리고 각 시도당 당원 수 1,000명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법정 요건으로 지역정당이 불가능한 구조이다. 팀 미라이의 경우 2025년 10월 기준 전체 당원 수가 1,394명에 머물고 있다. 한국 기준이었으면 아무리 국민들의 지지가 높더라도 창당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팀 미라이는 일본의 완화된 정당 설립 요건 덕분에 전국 조직과 대규모 자금 없이도 정치 참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러한 구조를 활용해 전문성을 가진 개인들이 모이는 방식으로 빠르게 조직화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한국 정치는 강력한 양당 구조가 확립되어 있다. 거대 양당에 유리하게 짜인 선거제도, 정치자금제도 등이 새로운 정당의 등장과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첫째,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뒤베르제의 법칙 Duverger’s Law 에 따르면 소선거구제는 양당제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국회의원 의석 총 300석 중 비례대표 의석 수는 46석으로 제한되어 있어 소규모 정당의 국회 진입이 어렵다. 셋째, 선거공영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15% 이상 득표해야 전액 보전해주고 있어(10% 이상 반액 보전) 정치 신인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넷째, 국고보조금 배분 기준도 거대 양당에 유리하게 규정되어 있어 80~90%를 양당에 배분하고 있다. 다섯째, TV 방송토론에 있어서도 초청 대상은 거대 정당으로 제한하고 있다.

    신제도론 new institutionalism 은 행태주의와 구제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이론으로, 사회 현상을 개인의 행동이 아닌 제도의 역할과 역사적 맥락에 따라 분석하는 이론이다. 퍼트남(Putnam)에 따르면 신제도론의 핵심 명제 중 하나는 “제도가 정치를 구조화한다(Institutions shape politics)”는 것이다. 이는 공식적인 제도들이 정치, 정치인, 정치적 행동 등을 변화시키고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한국의 각종 정치제도들은 단순한 게임의 규칙이라기보다 정치적 행동을 구조화하며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온 제도들의 집합일 것이다.

    제도는 기회를 만들기도 막기도 한다. 일본의 제도는 팀 미라이에게 기회를 제공해 준 반면, 한국의 제도는 가능성 있는 정치 신인들의 기회, 그리고 AI 와 같은 기술의 정치 영역 내 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다면 작은 제도의 차이가 두 나라의 정치지형에 큰 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치에 진입하려면 조직, 자금, 인맥이 필수적이다.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원내에 진입하기 어렵다. 그 결과 한국에는 팀 미라이처럼 AI 를 기반으로 기존 정치를 바꾸어 보겠다는 강력한 미래 비전을 가진 원내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권에서 기술, 청년, 미래에 대한 화두가 주변에만 머물고 있는 이유도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서일 것이다.

    과거 1988년 13대 총선 결과 집권당인 민정당(43.14%)이 과반 의석에 못 미쳐 DJ 평민당(23.75%), YS 통일민주당(20.07%), JP 공화당(11.70%) 등 여소야대의 ‘4당 분립체제’가 등장했다. 대통령은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려 해도 야당의 협조를 받아야했다. 다당제가 협치를 견인한 중요한 사례이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일본 정치에서 가장 진보적인 팀 미라이가 나온 반면, 다이내믹한 변화를 보여왔던 한국에서 아예 그런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고 할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대변되는 반도체 산업은 세계 제일을 달리고 있지만 정치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치에 필요한 것은 기술 개발이 아니라 구조 변화이고, 따라서 미래를 고민하는 제도 개편이 필요한 시점이다.

  • 고대 그리스의 선거 이야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오랜 기간 귀족정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토지 소유에 기반한 귀족계급이 정치 및 경제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 무렵 상공업이 발달하며 상인 계층이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하였다. 상인 계층은 돈을 벌면서 경제력은 획득했지만 정치 부분에서의 참여 배제로 인한 불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작농 등 농민 계층 역시 토지 소유 제한 문제로 귀족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렇게 귀족과 구분되는 계층을 통칭하여 ‘데모스 Demos’, 즉 시민으로 불렸다. 이러한 데모스의 불만을 최초로 해결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솔론이다. 솔론의 개혁은 소수 귀족들이 국정을 담당하였던 독점적 정치에서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토지가 아닌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권력을 비례하여 배분한다는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이를 티모크라티아 Timo-Kratia 로 부른다.

    이는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함으로써 참정권을 더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귀족정치보다 한 단계 진보된 정치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본인이 조절할 수 없지만 재산을 모으는 것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통상이 활발해지는 현실과 달리 여전히 부동산을 중심으로 권한을 배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따라서 솔론 은퇴 후 티모크라티아는 점점 저항을 받게 되었다.

    솔론의 개혁이 티모크라티아라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데모크라티아 Demos-Kratia’로 불렸다. 데모스(시민)에 의한 정치체제라는 의미로 민주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영어 Democracy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로마와 달리, 1인 1표가 원칙이었다. 로마에서는 백인대 centuria 라는 집단이 하나의 표를 행사했지만 아테네에서는 개인이 곧 정치의 단위였다. 투표권은 20세 이상의 남성 시민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민회(民會)에 직접 참여해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민회는 비정기적으로 소집되었는데 전쟁에 대한 의사결정, 강화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도 모두 민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정부관리의 선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민회에서 결정되었다.

    로버트 달(Dahl, 1989)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소규모의 동질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시민들은 동질적인 동시에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도 거의 없었다. 아테네는 소규모의 도시국가였기에 의사소통 하기에 충분히 작은 규모였던 동시에 다들 짧은 거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즉, 상호간 면대면이 가능한 도시국가였기에 가능한 정치체제였던 것이다.

    아테네의 정치는 의회 건물이 아니라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 기슭에 아고라가 건설되었다. 아고라는 ‘모이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민생활의 중심지를 의미하였다. 초기의 아고라는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었지만 점차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정치의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후세는 이것을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민 개개인이 국정에 직접 참여하고 국가권력 행사에도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전쟁, 동맹 등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결정을 모든 시민이 참여하여 결정하는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가 시행된 것은 아마 이 시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테네의 유권자(성인 남자 시민)의 수는 3만 ~ 4만 정도였고 평상시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1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잠실야구장 수용인원이 25,000명 정도이니 그 절반 정도가 모여 논의를 하고 투표를 해서 의결을 했다고 생각하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와 더불어 클레이스테네스가 실시한 또 다른 개혁으로는 ‘도편추방제 Ostracism’가 있었다. 도자기 파편에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투표하는 제도였다. 한 개인이 지나치게 강력해져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민회는 도편추방제 시행이 결정될 경우 2달 안에 투표를 진행해야만 했다. 투표를 해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당사자를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방은 일시적인 것으로 추방되더라도 시민권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재산을 몰수당하지도 않았다. 10년이 지나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요직에 뽑힐 수도 있었다.

    도편추방제에 있어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리스티데스에 관한 일화일 것이다. 도편추방 투표장에서 아테네 정계의 거물이었던 아리스티데스에게 한 사내가 도자기 파편을 내밀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실례지만, 이 파편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글을 몰라서요.”

    아리스티데스가 그 사내한테 아리스티데스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묻자 사내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아니요. 나는 그 사람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다만, 아리스티데스가 위대한 인물이라느니 정의로운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을 사방에서 하도 듣다 보니까 진저리가 나서요.”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 없이 도자기 파편에 자기 이름을 써서 돌려주었고 그해에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테미스토클레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 등이 이 제도로 인해 추방되었다. 다만 이러한 방식의 직접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를 낳았고 결국 해당 제도는 기원전 417년에 폐지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확대는 전쟁과도 관련이 있었다.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 주도의 도시국가 연합군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자비로 참전한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 부대의 팔랑크스 밀집대형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울러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따라 3단 갤리선(트리에레스)를 건조하여 해군을 강화했고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도 노꾼으로 무산 계급 시민들이 활약했다. 이러한 전투에서 시민들이 활약을 보임에 따라 이들의 발언권이 점차 커졌고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민주정치의 확립이 가속화되었다. 전쟁이 민주주의를 확장한 것이다.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수만 명 규모의 시민이 아고라에 모여 직접 정치에 참여한 체제는 이후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국가는 대표를 통해 지배하는 대의민주주의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의 규모가 커질수록 모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실험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는 누구의 것이고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와 관련한 중요한 질문을 여전히 현재에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Dahl, Robert A. (1989), Democracy and Its Critic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 미국 재건시대와 복원시대, 그리고 트럼프시대

    : 노예해방으로 인한 자유는 투표함 앞에서 멈췄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I believe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스스로 분열된 집은 설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이고 반은 자유인 상태로 영구히 존속할 수 없다고 믿는다.

        – 남북전쟁 전 애브러햄 링컨의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 중 (1858년 6월 16일)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예해방론자였던 링컨의 대통령직 취임으로 인해 남부 7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링컨의 연방정부는 남부 주의 연방 탈퇴를 인정하지 않았고 1861년 4월 12일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4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많은 기반시설이 파괴되었고 75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1865년, 4년간 이어진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나면서 노예가 해방되었고, 흑인들은 시민권과 투표권을 인정받게 되었다(수정헌법 제13조~제15조). 링컨의 노예해방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으며 동시에 재건시대 Reconstruction Era 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 수정헌법 제13조: 노예제도 폐지

    – 수정헌법 제14조: 흑인에게 시민권 부여

    – 수정헌법 제15조: 인종을 이유로 한 투표권 박탈 금지

    재건시대 흑인들은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대표를 선택했고 어떤 이들은 직접 선거에 나가 당선되어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1877년까지 이어진 재건시대 동안 흑인들은 백인 중심 정치체제에 새로이 진입할 수 있었다. 다만 재건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 기간이 10년 남짓밖에 안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 전체틀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건시대 수정헌법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흑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1877년 미국 제19대 대통령 러더퍼드 헤이스 Rutherford Hayes 는 남부에서 북부 군인을 철수시키고 재건을 종료하기로 남부 정치인들과 타협함으로써 선거인단 다수를 확보했다. 그리하여 남부에서 북부 군인이 떠나자 남부는 말 그대로 재건시대 이전으로 복원되었고 과거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억압적 제도들이 그 모습을 바꿔서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복원시대의 시작이었다.

    복원시대 Redemption Era 의 ‘복원’은 말 그대로 백인 우월주의 체제의 회복이었다. 재건시대를 주도했던 공화당 세력에 맞서 백인 민주당 세력인 복원주의자들 Redeemer 은 남부에서 다시 주도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짐크로우법 Jim Crow law 으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이 남부 주들에서 다시 심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남부연합은 수정헌법 제13조와 제14조를 피해 가기 위해 ‘짐크로우 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공공장소에서 합법적으로 백인과 유색 인종간 분리하는 것을 허용했다. 미국 흑인들은 “분리하되 평등원칙 separate but equal”을 강요받았다. 이 조치로 흑인들의 경제, 교육, 사회 등에서의 불평등은 더욱 고착되었다.

    1896년 대법원에서는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Plessy v. Ferguson, 163 U.S. 537, 1896년)’ 을 통해 이를 받아들였다. 극심한 논쟁이 있었던 이 판결을 통해 법원은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것이 평등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원과 같은 공공장소에 “검둥이와 개는 출입 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붙었을 정도로 흑인이 받은 고통은 극심하였다. 

    흑인들에 대한 공격은 재건시대 이전보다 오히려 더 거세졌다. 흑인들은 쿠 클럭스 클랜 Ku Klux Klan(우리에게는 KKK단으로 익숙한 백인 우월주의 표방단체)의 사적 제재 위협에도 늘 노출되었다. 선거권을 가진 흑인들이 선거인 등록이나 투표에 참여하는 경우에 KKK단은 괴롭힘, 협박, 폭력, 보복 등 각종 테러를 가했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흑인들에게 있어 재건시대의 높은 기대가 꺾인 이후 복원시대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1890년 남부의 주들은 인두세와 문해력 시험을 통해 흑인들의 선거권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즉, 투표를 하려면 세금을 내야 했고(인두세), 글을 읽고 쓰고 해석해야 했다(문해력 시험). 두 가지 조건에서 흑인들은 백인들에 비해 매우 불리했다.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가난한 이들은 주로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흑인 투표권은 사실상 박탈될 수밖에 없었다. 법은 존재했지만 권리는 사라지고 있었다.

    노예해방으로 인한 자유가 투표함 앞에서 멈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미국 정부는 유권자 등록 요건을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법안 이름은 SAVE(Safeguard American Voter Eligibility·투표자격보호) AMERICA 이다. 유권자 등록 시에는 시민권 증명을 요구하고 투표 시에는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 제시를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거의 유권자 등록 요건을 강화한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기 전에는 다른 법안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통과를 주장하는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은 유권자 등록 때 시민권 증명을 의무화하고, 시민권 증빙이 되지 않은 유권자를 등록한 선거관리 인원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선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민주당은 이 법안이 유색인종과 이민자 등 특정 집단의 투표권을 억압하려는 시도로 규정하고 반드시 저지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 법은 ‘짐 크로우 2.0’으로, 수천만 명의 미국인을 투표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신문기사 중 발췌

    선거는 단순히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유권자가 실제로 투표할 수 있는가이다. 재건시대 흑인의 투표권은 복원시대를 거치며 실제로 배제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1965년 투표권법 Voting Rights Act 제정으로 인해 문해력 시험 및 인두세 폐지가 이루어지며 이후 흑인 유권자에 대한 법적 차별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위에서 보는 것처럼 오늘날 미국에서 이 문제는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계속해서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선거와 투표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후퇴하고 다시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미국의 짐크로우 법을 1965년 투표권법이 막았지만 그 법을 오늘날 세이브 아메리카 법이 다시 막아서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재건시대, 복원시대, 짐크로우 같은 이야기가 트럼프시대를 맞아 다시금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